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H. H. 홈스 (문단 편집) === 체포와 사망, 그리고 만들어진 신화 === 홈스는 동료인 벤저민 파이츨을 살해했다. 그가 저지른 살인 중 확실하게 살인으로 인정된 것은 이것이다. 벤저민 파이츨은 전과가 있는 목수였는데, 홈스와 친분을 쌓은 후 그의 범죄 실행을 여러 번 도왔다고 한다. 법원은 벤저민이 위에서 말한 희생자들을 처리하고 은닉하는데 도움을 줬으리라 판단했다. 홈스는 1894년에 벤저민 파이츨이 폭발 사고로 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사망 보험금을 타낼 계획을 짰다. 이 과정에서 벤저민은 당연히 홈스가 위장용 시체를 구해오겠거니 여기고 가명으로 생명 보험에 가입했지만, 홈스는 진짜로 벤저민을 죽이고 시체를 불태웠다. 이후 그는 사망 보험금을 타낸 다음, 남편이 숨어있는 곳을 안다며 벤저민의 아내를 꾀어내 그 부부의 다섯 자녀 중 세 아이들(하워드, 앨리스, 넬리)을 여행에 동행하도록 만들었다. 홈스는 이 아이들을 계속 북부로 돌리다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살해했다. 아버지의 실종을 의심하고 신고하기 전에 입을 막기 위함이었다. 세 아이가 사라졌다는 신고를 받은 필라델피아 경찰은 홈스의 행적을 따라가다가 토론토의 한 임대 주택 지하실에서 썩어가는 앨리스와 넬리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어서 인디애나 폴리스에 위치한 홈스의 별장을 수색하여 하워드의 뼛조각과 치아를 굴뚝에서 찾아낸다. 후에 홈스의 증언에 따르면 엘리스와 넬리는 트렁크에 가둔 채 살인 가스를 퍼부어 죽었고, 하워드는 약물로 살해한 듯 하다. 이 중 살인 가스로 죽인 게 위의 '살인 호텔' 설정과 섞여서 홈스가 독가스를 흘려보내 투숙객을 죽였다는 소문이 된 것이다. 1894년 11월, [[핑커톤 전미탐정사무소]]는 미국을 떠나려던 H.H 홈스를 보스턴에서 체포하는데 성공한다. 보스턴 당국은 일단 절도 혐의로 영장을 발부하여 그의 신병을 구속한 다음, 여죄를 밝혀내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살인의 성'이라 불리는 시카고 잉글우드의 호텔로 몰려가 막무가내 취재를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그러나 정작 호텔에선 별 거 안 나와서 이 시기에 나온 호텔 관련 찌라시들은 100% 소설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홈스의 악명을 널리 알린 것은 이 잉글우드 호텔 뿐이다. 진짜로 시체가 발견된 토론토의 집은 별 주목도 못 받았고 어느 순간 도시 개발로 사라졌다. 1895년, 홈스는 벤저민 파이츨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이 시기 그는 시카고, 인디애나폴리스, 토론토에서 저지른 27건의 살인과 6건의 살인 미수를 추가로 자백한다. 문제는 홈스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사형수에, 많은 사이코패스들이 그렇듯 [[관심종자]]였고, 당시 언론은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데 혈안이 되어 있어서 홈스가 아무 말이나 뱉어내는 대가로 돈을 줄 준비[* 허스트 지는 홈스의 자백을 취재하는 대가로 약 1만불을 지불했다. 1895년의 1만불의 가치는 2020년 기준으로 35만불이 넘는다. 현재 가치로 1만불에 해당하는 2~300불을 지급한 것인지, 진짜로 당대에 현금 1만불을 지급했는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가 되어있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그가 자백한 여죄는 몽땅 거짓말이었다. 심지어 홈스가 죽였다고 주장한 27명 중 몇 명은 그 때 멀쩡히 살아있었고 몇몇은 확실히 병으로 죽었다. 기록을 토대로 보면 홈스가 확실히 살해한 사람은 파이츨 가족 4명이며, 증거는 확실하지 않으나 홈스가 해쳤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5명에 불과하다. 더구나 이 모든 살인은 철저하게 이득을 목표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시체 수집가가 아니라 그저 돈에 미쳐 4~9명의 사람들을 죽인 사이코패스였던 것이다. 그런데 홈스 본인의 거짓부렁과 황색 언론의 부풀리기 작전에 힘입어, H. H. 홈스는 '최소 수십명, 최대 130명을 죽인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살인마'로 변모했다. 19세기 영국에 [[잭 더 리퍼]]가 있다면 미국에는 H. H. 홈스가 있다고 할 정도로 대중의 반응은 열렬했다. 결국 그는 사망한지 120여년이 흐른 지금도 미국 연쇄 살인마의 대명사로 인용되고 있으니 어찌보면 관심 종자로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셈. > "나는 내 안의 악마와 함께 태어났다. 시인이 영감을 노래할 수밖에 없듯, 나는 살인마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악마는 나의 후원자로서 침대 옆에 서있었고 내가 태어나자 세상으로 안내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와 함께 했다. (I was born with the devil in me. I could not help the fact that I was a murderer, no more than the poet can help the inspiration to sing—I was born with the "Evil One" standing as my sponsor beside the bed where I was ushered into the world, and he has been with me since.)" <내 안의 악마(The devil in me)>가 등장하는 유명한 홈스의 선언. 문제는 이 문구는 홈스가 사람들 앞에서 직접 말한 게 아니라 [[신문]]에 기자가 홈스의 선언이랍시고 인용한 것이다. 저 문구에 가장 가까운 문장을 실은 신문은 1896년 4월 11일 <필라델피아 노스 아메리칸>지인데, 상술했듯 19세기 언론 보도의 정확성이란 믿을 것이 못 된다. 나름대로 타블로이드가 아닌 <뉴욕 타임스> 같은 정통지들도 선동과 날조, 어그로를 기자의 덕목으로 강조했고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기삿거리를 지어내는 걸 가볍게 여기던 때였다. 탐사 보도의 준칙은 20세기 중반에나 정립된 것이며 그 이전까지의 언론은 연예 가십지처럼 철저히 흥미본위로 돌아갔다. 실상은 저 홈스의 선언 전체가 기자의 창작품인데, 이게 또 수십년간 와전되다 위의 문구로 정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홈스는 누군가 자신의 시체를 도굴하여 해부하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사형 당하기 전에 관을 시멘트로 감싸서 10m 깊이의 땅 속에 묻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1896년 5월 7일, 모이어멘싱 교도소(현 필라델피아 카운티 교도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때 교수대에 결함이 있었는지 목이 제때 부러지지 않아 홈스는 15분 간 몸부림을 쳤고 20분이 지난 뒤에야 사망했다. 사형 직전 그의 태도는 침착했고 불안해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홈스가 잉글우드에 세운 건물은 1895년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를 겪고 우체국으로 이용되다 1938년 철거되었다. 현재 그 자리엔 [[우체국]]이 다시 세워졌다. 호텔이 있던 부지는 우체국 옆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사후 2017년에 시체가 발굴됐다. 홈스 대신 타인이 처형 당했고 홈스 본인은 살아남았다는 루머가 제기되자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인류학 연구팀이 확인 목적으로 관을 꺼낸 것이다. 시멘트 속에 묻혀서인지 옷과 콧수염이 부패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었고, 시체의 치아 형태가 홈스의 생전 기록과 일치하여 다른 이의 시체일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결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